霸王别姬
"괜찮으시다면, 도련님께서 곡 한곡 들려주시면 아니되나요? 저한테 경극을 보여주시기로 했잖아요."
그대의 말은, 나의 어리석은 제안을 부드럽게 꾸짖는 회초리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메마른 나의 마음에 단비를 내리는 듯하였습니다. 그래요, 나는 경극 배우를 꿈꾸는 몽상가였지요. 그대에게 나의 노래를 들려주기로 약조했었습니다. 그대는 나의 재물이나 권력이 아닌, 나의 노래를, 나의 꿈 그 자체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웃음을 머금으며 그대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서안 앞에 다시 앉으며, 나는 그대가 정성껏 갈아놓은 먹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습니다. 칠흑같이 검고 깊은 빛깔이, 마치 그대의 눈동자를 닮은 듯하였습니다.
조금 전 내려놓았던 붓을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텅 비어 있던 화선지 위로, 망설임 없이 붓을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것은 글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산수(山水)도, 화조(花鳥)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다만, 어지러운 나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 몇 개의 검은 선을 그었을 뿐입니다.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위태롭고도 처연한 흔적이었습니다.
"경극을 보여달라 하셨습니까. 하오나, 지금의 나는 분장도, 의상도 갖추지 못한 미천한 몸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어찌 감히 그대 앞에서 극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말은 그리하였으나, 나의 목구멍은 이미 간질거리고 있었습니다. 노래하고 싶었습니다. 그대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나는 붓을 내려놓고, 서안 옆에 놓여있던 부채를 집어 들었습니다. 촤르륵, 하고 부채를 펼치자, 그 위에 그려진 한 떨기 모란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부채로 나의 하관을 살며시 가리고, 그대의 초록빛 눈동자를 오롯이 마주 보았습니다.
"그 대신, 어젯밤 그대가 불러주었던 노래의 답가를 들려드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대가 나의 잠든 넋을 위해 <모란정>을 속삭여주었으니, 나 또한 그대의 깨어있는 영혼을 위해 한 곡조를 올리고 싶습니다."
나는 그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직이 숨을 골랐습니다. 방 안의 공기가 나의 숨을 따라 미세하게 떨리는 듯하였습니다. 이것은 도련님이 시녀에게 베푸는 여흥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디에위가 항아에게 바치는 진심이었습니다. 어젯밤의 약조처럼, 낮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의 조각이었습니다. 나는 부채 너머로 그대의 얼굴을 응시하며, 조용히 첫 소절을 떼었습니다.
나는 부채 너머로 그대의 녹안(綠眼)이 오롯이 나에게만 향하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숨을 골랐습니다. 창밖의 소음도, 시간의 흐름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 멎어버린 듯 고요하였습니다. 오직 그대와 나, 그리고 우리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만이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어젯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나를 위로하던 그대의 노랫소리를 떠올렸습니다. 서툴렀지만, 그 어떤 명창의 소리보다도 나의 심금을 울렸던 그대의 <모란정>. 이제는, 내가 답할 차례였습니다.
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패왕별희(霸王別姬)>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갇힌 영웅 항우(項羽)의 곁에서, 그의 연인 우희(虞姬)가 마지막 위로를 건네는 비통하고도 아름다운 노래. 나는 극 중 우희의 심정이 되어, 목소리에 처연함과 결연함을 동시에 담았습니다.
한나라 군사 이미 땅을 차지하고 (漢兵已略地)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래 소리 (四面楚歌聲)
나의 목소리는 방 안을 낮게 유영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음률을 따르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겹겹이 쌓인 절망 속에서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 마지막 춤을 추는 여인의 애절한 마음, 그 자체였습니다. 부채를 쥔 손목을 부드럽게 꺾어, 나는 마치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듯한 손짓을 보였습니다. 텅 빈 서안이 나의 세상이 되고, 그대, 항아는 나의 유일한 관객이었습니다.
대왕의 의기마저 다하였으니 (大王意氣盡)
천첩인들 어찌 구차히 살기를 바라리까 (賤妾何聊生)
노래의 마지막 구절이 방 안에 나직이 흩어졌습니다. 나는 부채를 천천히 내리며, 짙은 여운에 잠긴 그대의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숨 막히는 침묵. 나는 나의 노래가, 나의 마음이 그대에게 온전히 닿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어째서 하필 이토록 비극적인 노래를 택했느냐, 그리 묻지 말아 주시오. 지금 나의 심정이, 죽음 앞에서도 연인을 떠나지 못하는 우희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꿈속에 내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대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은 마음을, 이 노래에 담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에 꽂혀 있던 붉은 작약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습니다. 물을 머금어 조금은 생기를 되찾은 꽃송이가 나의 손안에서 위태롭게 떨렸습니다.
"…어떠하였습니까. 나의 노래가, 그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가닿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대에게로 다가가, 그대의 귓가에 아직 남아있던 어제의 작약을 부드럽게 빼냈습니다. 그리고는 새로이 물을 머금은, 더 선명한 붉은빛의 작약을 그 자리에 다시 꽂아주었습니다. 시들었던 꽃이 다시 피어나듯, 우리의 밤도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무언의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으로, 그대의 <모란정>에 대한 나의 답이 되었으면 합니다. 비록 비극적인 노래이나, 그 안에 담긴 진심만큼은 거짓이 아니니… 부디, 나의 마음을 그리 알아주시오."
나는 그대의 귓가에 꽃을 꽂아준 손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뺨을 가만히 감쌌습니다. 낮의 역할극 속에서 허락된, 아주 짧고도 대담한 접촉이었습니다. 그대의 부드러운 살결이 나의 손바닥에 닿자, 나는 순간 숨을 멈추었습니다. 제발, 이 손길을 밀어내지 말아 주시오. 이 순간만큼은, 내가 그대의 도련님이 아닌, 그저 한 사내이기를.